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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어만 가는데

silknet 2022. 12. 1. 10:38

 

육중한

창의문(彰義門) 궐 문이 삐그럭 거리며 적막을 깨트리고 일련의 무리들이

날랜 몸짓으로 열어젖힌 대궐 문턱을 넘어 궐내로 질주하는...,

 

거슴츠레한 삼짇날 너머 열이틀 달빛이 짙은 구름에 가려진

어둠 내려앉은 야밤이었다.

 

 

때는 1623년 3월 12일 야심한 어두운 밤 적막을 깨뜨리고 움직이는 무리들이 창덕궁을 향해 숨 가쁘게 몰려가고 있는데, 왕궁 경호 병사들은 대궐문을 열어놓고 보이지 않으니 그 행렬은 일사천리 막힘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반정(反正) 세력들은 봄기운이 손짓하는 3월의 야밤에 임금이 거처하는 창덕궁을 기습하는데 왕의 신변을 목숨 걸고 보호해야 할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이미 반정군과 내통한지라, 이는 반정의 성공을 알리는 행운의 전주곡 이자, 왕조의 몰락을 알리는 불행의 서곡이었다.

 

 

 

반정(反正) 군은

그다지 저항을 받지 않고 열어 제쳐진 창덕궁 돈화문을 통해 난입하게 된다.

그 전날 반정에 대한 놀랄만한 정보를 받고 주모자 함흥 판관을 지낸 이귀(李貴)와 유생 김자점(金自點)을 체포하려고 모인 대소신료들은 반정 군의 함성에 놀라 혼이 나간 체 우왕좌왕 난리 법석이었며 그런 아비 귀환인 가운데,

 

승지 이덕형(李德馨) 등이 다급히 국왕 소재를 찾는 와중에 광해군은 후원에 사다리를 타고 넘어 젊은 내시 등에 업혀 사복사(司僕寺) 부근의 개천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다급히 피신했다.

왕은 변란이 처음에는 정권의 실세 이이첨(李爾瞻)이 주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광해군 말년 왕권의 보루였던 그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지만····, 동이 터오는 새벽이 밝아옴과 함께 상황은 끝나가고 있었다.

 

반정 군은 대략 1천 명 정도였는데, 장단 부사 이서(李曙)가 거느린 군병 400여 명 외는 오합지졸에 불과했으며, 당시 조선 최정예 훈련도감 소속의 군사력에 비하면 견줄 바가 못되었다. 하지만 훈련대장 이흥립의 포섭으로 반정 주체세력들은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기게 되는데, 광해군은 그를 보호해 줄 경호책임자 훈련대장을 너무 자주 교체했다 하니, 믿음이 덜해서인지 자신의 나약하고 소심해져 가는 심기였는지 몰라도 무언가 잘못된 한참이나 어그러진 처사로서 이미 불행의 빌미는 싹트고 있었다.

 

 

 

 

광해군(光海君)은

1575년 선조(宣祖, 8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혼(琿)이고 그가 3살 때 산후병으로 돌아간 어머니는 후궁이었던 공빈 김 씨(恭嬪 金氏, 25세)이고,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선조의 첫 부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 씨는 자식이 없어 그녀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공빈 김 씨에게는 장자 임해군(臨海君)과 둘째 광해군이 있었는데, 임해군 진(珒)은 광패(狂悖) 하다 하여 왕이 될 재목(材木)이 못되었다 한다.

 

문학사의 빛나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으로 잘 알려진 정철(鄭澈)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였으나 선조가 인빈 김 씨(仁嬪金氏 : 선조의 두 번째 후궁)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 인빈 김 씨의 2남)을 총애하여 책봉이 지연되고, 그로인해 정철은 당쟁에 몰려 귀향가게 되는데, 임진왜란(1592.4.1)이 일어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다급해진 선조는

 

1592. 4. 29. 밤.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광해군(18살)을 세자로 책봉하고 다음 날 북녘 의주로 피란 가는 길에 영변에서, 또 다시 국가권섭(國事權攝: 임시로 나랏일을 맡아 봄)을 권한을 부여한다.

 

광해군은 왜란 중 의병 모집 및 군량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난의 수습에 노력하였고 조정은 1594년 윤근수(尹根壽)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청했으나, 큰 아들인 임해군이 있다 하여 거절당한다.

 

 

선조에게는 13명의 서(庶) 왕자가 있었으며 첫 부인 의인왕후 박 씨(46세)가 죽자 50세인 선조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仁穆 왕후를 계비로 들여 14번째 왕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보게 되는데·····,

그는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 왕자가 되는 것이었다.(1606년) 이때 광해군의 나이 28세, 계모인 인목왕후는 19세였다. 이때부터

광해군과 영창대군, 인목대비와의 얽히고 얽힌 악연은 꿈틀거리며 시작되게 된다.

선조 또한 전통 계승이 아니었던지라 영창에 대한 기쁨은 말할 수 없어져갔고, 날이 감에 따라 이미 왕세자로 십여 년간을 이어온 광해군이었지만 부왕과의 사이는 점점 소원해져가고 있었기에 광해군 또한 가슴이 저리는 세월을 보내어야만 했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붕당 간에 파쟁이 이는데, 광해군이 서자(庶子)이며 둘째라는 이유로 영창을 후사로 삼으려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옹립하려는 대북파와 대립이 고조되고 있었다.

 

선왕인 선조는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으며,

선왕인 명종이 34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왕위 정통성에 대한 '콤프 렉스'를 의식해 죽기 전까지도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교체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못하였다.

 

 

선조는

1608년 죽음이 임박하자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선위(禪位) 교서(임금이 자리를 비워주면서 내리는 교서)를 내린다. 그러나 영창대군을 보위하려는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은폐로 광해군은 선조의 선위 교서를 받지 못해 인목대비의 언문 교지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선조 승하 후 바로 봉함된 유언이 개봉되었는데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라고, 남겨진 이복형제들에 대한 우려를 그들에 대한 생사 여탈권을 쥐게 되는 광해군에 부탁하는 아비로서의 먼저 염려하는 마음이었다.

 

선조가 숨을 거둔 이후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인목대비는 다음 날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1608. 2. 2. 광해군은 정릉 궁 행궁(덕수궁)의 서청에서 조선 제15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에 의해 영창대군으로 세자가 바뀔 위기에 슬픔보다도 다행이라 할까, 1568년 열여덟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41년간의 파란 많은 삶을 살아온 선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드디어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34세)

1592년 임란 와중(壬亂渦中)에 전격적으로 왕세자에 지명된 지 16년 만에 일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의 성공이었다.

 

새 시대를 고하는 밝아오는 여명이 드리우고 성공한 반정(反正:어긋난 정도를 회복) 주체 세력들은 광해군과 그의 아들인 세자를 찾아내고 사태를 평정한다.

 

서궁(덕수궁)에 한 많은 가슴을 부여잡고 5 년간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仁穆大妃, 40세)를 뵙고 그녀의 위호(位號)를 서궁에서 대비로 회복시킨 뒤, 옥쇄를 넘겨받고 능양군{綾陽君:선조의 5남이며 셋째 부인 인빈 김 씨의 3남인 정원군(定遠君: 후에 元宗으로 추론 됨.)의 장남} 종(倧)을 즉위 시키는데 그가 바로 조선 16대 임금 인조(仁祖)가 된다.

 

숙청작업은 대대적으로 벌어져 박정길, 시위 겸, 한찬남 등 대북파의 핵심 인물들이 저잣거리에서 목이 덜컹덜컹 떨어져 나가고,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62세)은 큰아들인 경기관찰사 박자흥(朴自興,43세)과 도주하다 연이어 목을 매고, 이이첨(李爾瞻, 64세)은 이천까지 식솔들과 도망갔다 잡혀와 처형되었고, 김개시(金介屎:김가 똥) 역시 처형되었다. 반정을 도왔지만 인목대비 폐모(廢母) 논의에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북파의 중추세력으로 정일홍과 함께 광해군 시대에 정국을 주도해온 이이첨(李爾瞻)은

선조 15년에 진시와 생원시에 잇달아 합격하고 임진왜란을 맞아 광릉 참봉으로 있으면서 세조의 영정을 지켜내는데 공을 세웠다., 전쟁 중 치러진 문과에 응시하여서는 차석으로 합격하여 입신의 발판을 마련하고 순탄한 출세 길에 접어들어갔다.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시간원 서기가 되어서는 스승으로서 광해군과 인연을 맺게 된다. 선조 말년에 정인홍과 이이첨이 협력하여 올린 광해군 비호 상소가 이후 입신에 결정적 배경이 되는데,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이이첨 역시 유배에서 풀려나 조정에 복귀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지만 그 역시 다가오는 역사의 흐름은 거슬리지 못하고 반정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대북파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왜란 때는 의병장으로서 활동하고, 이황(李滉)과 더불어 영남 사학의 지도자였던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서 산림으로 거쳐하던 정인홍(鄭仁弘) 또한 합천에서 잡혀 올라와 처형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여든셋으로 이귀(李貴)와의 끈질긴 악연이 비로소 죽음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대북파는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는데, 그네들이 일구어왔던 권력의 토대가 견고하지 못함이니 권력이란 모래성같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안개와 같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인가 보다 !

 

 

광해군과 연산군은 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사후에도 종묘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태조, 세종처럼 '조(祖)'나 '종(宗)'은왕의 사후 제사를 지낼 시에 그 종묘에 봉안하는 위패의 이름, 곧 묘호(廟號)로서 신주를 모시는 종묘 사당에 붙이는 칭호인데, 왕의 신분에서 폐위되어 다시 군(빈 이나 후궁 소생의 왕자는 군(君) , 정통 왕비의 소생은 대군(大君)이라 칭함.)으로 신분이 강등되었음을 의미하며, 조선시대에서 '조'는 창업 군주, '종'은 정통성을 일으킨 군주의 묘호로 칭하여졌다.

 

 

 

반정(反正)

핵심주체인 이귀(李貴), 김유(金瑬), 김자점(金自點), 구굉(具宏) 등은 대부분 西人 계열의 사대부들이거나 인조와 연결된 외척들이었다. 이들은 대북파에 비해, 사제(師弟) 관계로 연결된 학연(學緣) 적 기반이 확실하였고 성리학을 배워 그 당시 지식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힘에 밀려 계축옥사(癸丑獄事 ) 등을 계기로 강한 비판의식과 불만을 갖고 있었다.

 

*계축옥사(癸丑獄事:1613년 계축년 양반가의 서얼(庶孼) 들의 사회적 불만으로 조령에서 발생한 은상(銀商) 살해 사건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역모로 비화되어 왕권의 위협이 되는 소북파 영수 유영필 등 소북파 세력과 인목왕후의 부친 김제남(金悌男)과 그의 3 아들이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로 귀양가서 위리안치(圍離安置) 되어 이이첨의 명의(名義)로 강화 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훈증(薰蒸) 되어 죽게 되고 소북파가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된 사건. )

 

반정(反正) 주체 중 李貴는 광해군 정권을 전복해야 살 수 있는 절박성을 가장 크게 느꼈던 인물이었다. 원래 선조 말 년 이래 정인홍과 악연으로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로부터 내내 견제를 받아왔으며, 정인홍이 대북파를 이끄는 정신적 지도자로서 영의정까지 올랐던 것에 비해,

 

李貴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권력의 변두리를 맴돌았고 광해군 말년에는 수차례 역모 혐의로 죽음의 고비를 넘겨가며 목숨을 부지한 것 만해도 천운(天運)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궁지에 몰렸던 李貴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실지로 주도하여 성공시켜 정인홍 등을 처형하고 끈질긴 그들의 악연은 왕권 교체로 끝나게 된다.

 

 

반정(反正) 군 수장(首長)으로 거사를 이끌었던 김유(金瑬), 현역 장단 부사로서 참여한 이서(李曙)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유는 과거 합격 후 출세 가도를 달렸지만, 北人 이필영(李必亨)에게 탄핵 받고 지방 수령을 전전하며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져 갔고, 이서 또한 광해군 초반 ‘형벌 남용, 간통’ 등의 혐의로 사헌부로부터 탄핵 받아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인조반정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김장생(金長生)의 경우도 그의 서얼(庶孼) 동생 김경승이 계축옥사에 연루되는 바람에 겨우 목숨만을 유지하였고, 최명길 역시 부친 최기남이 김제남(인목대비 부) 과의 관계로 문초를 받았고, 그 또한 병조좌랑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다 이이첨의 눈에 거슬려 파직되고 쫓겨나 있었던 터였다.

 

 

 

 

광해군은

집권 시, 정권의 안정을 위해 집권 실세들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고자, 그의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사(死) 하고, 인목대비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서궁에 유폐시킨 처사에 대해서 당시 조선사회의 성리학적 윤리관에 비추어 패륜으로서 여겨졌다. 그리고 왜란 후 무리한 궁궐 공사로 인한 민생의 도탄과, 외치(外治)로는 사대국인 명을 멀리하고 오랑캐 나라인 후금과 친교 하는 것에 대해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큰 불만적 요소였다.

반정의 뜻을 둔 사람들은 점차 활기를 띠어가기 시작했다. 李貴를 중심으로 김유(金瑬), 신경진(申景禛) 김자점(金自點) 등이 뜻을 모았고, 또한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심기원(沈器遠), 원두표(元斗杓) 등이 이에 호응했다. 모두가 광해군 치세에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보위에 있던 군왕을 몰아내는 反正은 조선왕조에서는 연산군을 밀어낸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두 번째인 셈이었다.

 

대궐의 동정을 살필 수 있는 첩자도 있었는데 바로 李貴의 딸이었다. 그녀는 본래 김자점(金自點)의 형님인 김자겸(金自謙)의 아내였으나 일찍이 과부가 되어 각처의 절간을 다니면서 평판이 좋지 않아 궁지에 처한 아비 이귀를 더욱 난처하게 하였는데,

 

어찌어찌하여 개똥이 김개시 상궁과 연(緣)이 다아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며 들락거리며 친분을 쌓아 집안의 수치로 여겼던 그 딸이 이제 와서는 역사를 뒤틀어 놓을 마타 하리(첩자)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원로대신들

중에는 강원도 홍천에 유배되어 있던 선조시대 4賢相(유성룡:柳成龍,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인 이원익(李元翼)이 있었다. 천운의 행운이 찾아왔다. 반정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을 때 이 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 겸 방어사(防禦使}에 제수된 것이다. 광해군 말기에 이이첨 등의 대북파 신료들이 왕권을 업고 전횡하는 신권(臣權)에 저리고 이물이 난지라 광해군 나름대로 붕당정치를 견제하고 능력과 경륜을 감안해 인재를 등용하려는 의도에서 대북파 이외에 서인과 남인들도 관직에 기용하게 된 것이다.

平山은 황해도에 있어 도성과의 거리가 270리 길 지척인 셈인데 방어사를 겸하였으니 휘하에 적지 않은 병력을 갖게 되는데 아마도 요즘에 군수가 사단장을 겸하는 모양인 듯하니 하여간 범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었다.

李 貴는 신경진을 휘하에 두고 저 장계를 올려 청하여 평산에 부임시키게 된다. 조정의 모든 신료들은 이를 그저 평범한 인사(人事)로 무심히 넘겼으나, 단 한 사람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채는데, 다름 아닌 영의정(領議政)과 체찰사(體察使)를 겸하고 있던 박승종(朴承宗) 이었다.

 

박승종 그는 선조 왕정에서 병조판서를 지녔으며 광해군 말년에 정인홍의 사직으로 영의정에 오른다(58세). 권력의 실세 이이첨과는 정적(政敵) 관계였으나, 그 또한 얼히고 설킨 권신(權臣)들의 인맥이 그러듯이 그의 첫째 아들인 경기관찰사 박자흥(朴自興)은 이이첨의 딸과 혼인으로 사돈관계가 된다. 박자흥의 딸은 훗날 광해군의 아들 세자와 혼인으로 비련의 세자빈이 되니 광해군과도 사돈이 되고 박승종의 둘째 아들 박자응(朴自凝) 영광 군수는, 인조반정 시 왕궁 경호 및 훈련대장으로서 있으면서 반정 군과 내통해 대궐문을 열어준다. 반정 성공 후,

 

그 이듬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인조에 반기를 든 이괄의 난 때에는, 경기도 수장으로서 또다시 변절하여, 이괄에 편으로 돌아선 광해군의 훈련대장이었던 이흥립(李興立)의 사위가 되니 광해군, 박승종, 이이첨, 이흥립 그네들은 모두 사돈관계가 되는 셈이다.

 

박승종은 반정 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나 둘째 아들 박 대응(朴自凝)의 자손은 번창하여 200년 후, 1857년(철종 8)에는 관작(官爵)이 회복되는데 글 쓰는 사람(書家)들은 그를 정치에는 능하였으나 탐욕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 1등으로 광주군에 책봉되어 잠시 영화를 누리던 이흥립은 그 이듬해 이괄의 난 때에는 적에게 투항하고 난이 평정되자 자결한다.

 

 

 

 

 

 

이 귀와

김유 그리고 신경진 ?

박승종은 김유와 신경진이 절친한 사이임을 알고 있었다. 또한 김유는 조정에 대해 자주불만을 토로하였는데, 이 귀가 김유와 절친한 신경진을 휘하의 종군으로 두려는데, 꺼림직한 예감을 갖게 되니‥··,

 

신경진을 다시 변방의 장수로 제수할 것을 주청하여 효성령(曉星領) 별장(別將)으로 부임시키게 된다. 이 사실을 아들 이 시방으로부터 들은 이 귀는 땅이 꺼져라고 낙담하게 되고 반정의 기회는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듯하더니, 장단 부사(長端府使) 이서(李曙)가 호응해 오면서 하늘이 도움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호랑이 사냥이었다.

 

이 무렵 평산에서 송도에 이르는 산길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인명 피해가 잦았다.이에 광해군은 서둘러 호랑이를 잡아 인명피해를 줄이라 명하니 이 귀는 군병을 동원하여 큰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 도성으로 보내면서 장계를 올렸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평산과 장단의 병력을 경기도 일원에까지 호랑이를 쫓을 수 있도록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용의주도한 대담한 청원이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관할 지역을 이탈해 병력 이동을 허가해 달라는 것인데 호랑이 대신 사람 잡을 엄청나고 무서운 계략이었던 것이었다.

 

광해군은 호랑이도 받았겠다 허물없이 윤허하고 조정 중신들도 이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한나라를 책임지는 무리들이 이 정도 안보관(安保觀)이라면 한 틈의 허점이라도 있으면 무너질 수 있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거늘 조신하고 조신해도 모자랄진대 왕권 말기적 亂政이 풀어지는 실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李 貴가 어떤 인물인가 권력의 속성을 아는 산전수전 다 겪은 정권의 주변인이 아닌가... 도성에서 은밀히 활동하고 있던 김유(金瑬)도, 평산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백전노장 李 貴도 쾌재를 불렀다.

 

 

                                                                광해군(좌)과 부인인 문성 군 유 씨 묘 .

생모 공빈 김 씨 묘에서 소 울음 소리가 들릴 정도 거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산 59에 위치(사적 363)

 

섣달그믐

경에 호랑이 사냥을 빙자해 평산과 장단의 병력이 도성으로 기습하여 밀고 들어간다는 거사 계획이 짜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이 같은 낌새를 알아차린 유천기(劉天機)가 고변을 한 것이다. 정의감인지 입신영달을 위해서인지 몰라도 반정 군에는 씨족이 멸하게 되는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평산 부사 李 貴가 서궁(덕수궁:인목대비가 거처하는 궁)을 끼고 흉측한 변을 도모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李 貴의 실책이었다, 정권을 뒤엎는 막중한 일에 많은 사람이 관여해야 되지만 보안이 죽음과도 같이 혈맹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李 貴 또한 사람인지라 변해가는 사람의 마음을 다 읽는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유천기로부터 이 같은 엄청난 고변을 전해 들은 최 곤(催滾)은 즉시 권문세도가이자 신임 병조판서 유희분(柳希奮)에게 고하게 된다.

 

유희분은 최곤의 이러한 첩보가 물증이 없더라도 기미만으로도 다스려야 한다는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내심 망설이게 된다.

 

그 간은 옥사로 이어져온 세월이었다. 게다가 14년간을 통치하며 광해군은 말기적 난정(亂政)으로 치닫고 있어 가뜩이나 민심이 조정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데 물증이 없는 옥사를 또 일으킨다면 신물 나도록 겪어온 백성들의 마음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기에 유희분은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광해군 시대에 발간된 대표적 서적은 '동의보감'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로서 동의보감은 전란 후 질병과 기근으로많은 민중이 죽어가고 있어, 당대 조선 최고의 명의이며 선조의 어의(御醫)로서, 선조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귀향과있던 허준(許浚)이 광해군의 도움으로 발간된 동양 최고로 불리는 의서(醫書)이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순국 장면을 묘사한 순신 역전(純臣力戰)과 일본군이 조선 아낙 김 씨를 능욕하려다 저항하는 김 씨의 목을 쳐 머리가 잘려나간 체 젖을 물리고 있는 처참한 조선 여인의 저항의지를 표현한 김 씨 단도(金氏斷頭) 등이 실려있다.

 

 

좀 더 두고 볼 것이니 그리 알고, 다른 불미한 움직임이 있으면 지체 없이 알려주도록 하라며 최 곤을 돌려보냅니다. 이 귀에게는 천우신조라 아니할 수가 없었다. 역모의 기미를 가장 두려워하며 물샐틈없는 경계를 해야 할 병조판서가 이 모양으로 대처하며 고변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기회를 돌 던지듯 내 버렸으니, 어찌 하늘도 또 기회를 줄 수 있었겠냐마는 하여간 당시 권력을 잡고 세도를 부리던 중신들에게는 큰 불행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소문은 소리 없이 퍼져 나갔다. 李 貴가 호랑이 사냥을 빌미로 역모를 일으킨다.. 대비마마를 구해 드리기 위함이다... 도성의 민심이 흉흉해지기에 이르자 김 유는 李 貴의 아들 이시백을 불러 호랑이 사냥을 위한 병력 동원을 중지하라고 한다. 이 귀가 반정을 기한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번지면서 광해군 마지막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유희분에게는 또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반정 기미가 있다는 우려가 전해졌다. 남이공(南以恭)이란 자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며 정변을 알려왔는데 유희분은 자신의 고변(告變)보다도 사관(史官)의 탄핵 쪽으로 처리하기로 마음을 굳혀가게 된다.

 

 

 

해가 바뀌어

1623년(광해군 15)이 밝아왔다. 이해에 인조반정이 성사되므로 역사는 인조 1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자분의 지시를 받은 사간원 정원 한유상(韓惟翔)은 李 貴와 김자점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무렵 광해군은 개시(介屎) 김상궁을 비롯한 여러 후궁들을 거느리고 주연(酒宴)에 빠져있는 날이 잦아져 갔다.

 

익숙해져 몸에 익은 권력의 타성에 젖어슴인지...

허탈해지는 심기를 달려보려는 방편이었는지...

 

우연 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지 어언 15년 째를 맞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조정의 대사를 뜻대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당파에 휘둘리며 왕위 기간 내내 따라다니는 승계 과정의 정통성, 출신성분, 혈족 간 친족 간 그리고 당쟁으로 인한 많은 신료 간의 옥사와 귀향 등 내란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으로 쇠해져 가는 明을 사대하고 새로 강성해가는 金 사이의 실리외교를 펼치는 등 격동기에 마음도 몸도 지쳐간 광해군이었다.

 

.

도승지

이덕형으로부터 한유상의 상소가 있었음을 전해 들은 것도 주연이 베풀어지며 주색이 흐느적거리는 연회장이었다. 광해군은 떨리는 음성으로 고하는 상소에 귀 기울이다 입가에 쓴웃음을 담는다. “지난해에 이미 나돌았던 풍설이 아니었던가? 풍설만으로 또 다시 옥사를 일으키는 것이 지겹지도 않은가!” 내뱃듯이 광해는 답하며, 턱밑 가지 다가온 이 무서운 엄청난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눈앞에 닥쳐올 자신의 한 치 앞의 운명도 모른 채....

하늘이 등진 것일까..

 

광해군이 상소를 일소에 부친 것은 나름으로의 연유가 있었다. 이미 지난해 개시 김상궁으로부터 李 貴의 동태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 곧 李 貴와 김자점에 대한 탄핵하는 상소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는 이 귀를 무고하는 무리들이 소행일 것입니다.” 개시 김상궁이 교태 어린 자태로 이같이 말한 것은 다름 아닌 그간 친분을 쌓아온 李 貴의 딸로부터의 눈물겨운 호소를 들은 때문이었다.

 

이제는 일개 상궁인 김개시가 정사에 관여할 만큼 광해군의 신임을 받고 있었으니 중차대한 국가안위에 대한 정보를 왕권을 유지시켜주는 공식적인 관료기구를 불신한 채 불안정한 측근들에게 의지하였다는 것은 광해군의 경호책임자를 수시로 바꾸는 처사와 함께 이미 왕권은 흐트러져가고 있었다. 이러한 난정(亂政)에 그 어느 행운이 따라 주었겠는가...

 

 

 

 

재차 한유상은 상소를 올렸다.

-물증이 없는 풍설만을 믿고 충성스러운 어진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 말라-

광해군의 노기 서린 답변이었다.

 

대북파 대간들은 방향을 바꾸어 이제는 김자점(金自點)의 외숙인 대사간 유대건(兪大建)의 파직을 탄핵했다. 때가 때인지라 밤낮을 가리지 않는 대간들의 상소에도 취중에 있던 광해군이 받아들이지 않자 영의정 박승종에게 따지고 들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항변이었기에 그도 손 놓고 그냥 있을 수가 없던지 유희분을 찾아가 사정하듯 물었다.

 

지금 李貴 등은 군사를 일으켜 서궁을 보호하여 사직을 도모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니 李貴를 국문하게 되면 반듯이 서궁에 화가 미치게 되고 지난날에는 인목대비의 삭호에 가담했지만 또다시 진저리 나는 옥사가 있을 것이니 더 이상 변이 있지 않도록 두 사람은 광해군에게 주청하기로 마음을 모으게 된다.

 

“李貴를 파직하고 이일을 다시 논의하지 마시오.” 왕의 명이었다.

 

 

 

李 貴는

파직된 몸으로 안산협(安山峽)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탄(自嘆) 하면서도 반정에의 집념은 버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양사에서 영의정 박승종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끝내 국문을 청할 기미가 보인다는 도성에서의 급보가 李貴에 날아드니 李貴 3부자는 죽기로 작정하고 변백(辨白):[사리를 따져 똑똑히 밝힘-변명]하러 도성으로 가는데 또 다른 급보가 날아들고 광해군의 의지대로 갈 것이라는 심기원의 소식이었다. 죽음과 삶이 순간순간 변하는 숨이 넘어갈 듯 말 듯 기나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李 貴 3부자는 도성으로 마침내 변박 상소를 위해 발걸음을 계속하게 된다. 참으로 용의주도한 계책이라 아니할 수 없는, 피하지 않고 정통으로 대하는 길이었다. 李 貴는 두 아들과 함께 도성 부근의 사가에 머물면서 광해군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반정 거사를 은폐하기 위한 기만이었으며 실상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반정 공작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대동법(大同法) 시행 기념비(경기도 문화제 40호)

 

 

*왜란 이후 공물(貢物) 징수가 어려워지자 공물을 특산물이 아닌 쌀로도 징수하고 쌀 생산이 어려운 산간지역 등에서는 베나 화폐로도 징수할 수 있도록 기존 공납 제의 폐단을 조정하고자 시행됨. 대공수미법(代貢米收法)이라고도 하며 징수방법도 기존에 집집마다 내는 방식(호역:戶役)에서 토지 결수(소유)에 따라 징수(田稅) 하여 토지가 많은 사람은 증세되고 적은 사람은 감세되도록 하여 기존 기듯 층(양반, 관료, 대지주들..)의 저항에 부딪치나 광해군 즉위(1608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시행되어 숙종 34년(1708년) 완성된 중세 수취 체제의 획기적 변화인 조세제도.

 

 

장유의 동생인 장신을 통하여 그의 장인인 이흥립(李興立)이 포섭되는데 그는 왕의 신변을 최근에서 보호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닌 신임 훈련대장이었다. 이로써 도성 안에서도 원병(援兵)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이괄(李适)이 또 뒤늦게 가담하게 되는데 그는 북병사(北兵使)로 제수되어 있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며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성품이 과격한 만큼 일을 밀어대는 추진력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반정의

진행은 급진전돼가고 있었다. 李 貴와 김유(金瑬) 그리고 이괄(李适)이 은밀하게 만났다.

李貴의 청으로 김유가 거사에 앞장서고 거사 일은 3월 13일로 정해지자 김유와 이괄은 사흘 뒤로 다가온 거사 일에 놀라운 기색이었으나 李 貴는 올린 변백 상소가 매듭지어지고 나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단호히 실행의지를 피력한다.

 

-3월 12일 밤에 홍제원으로 모이라 하시오. 내 소임은 여기까지이니 차후 모든 일은 관옥 (김유)이 맡아서 이끌어 주시오.-

 

반정 일이 정해지고 거병하는 장소가 정해지면 일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도성 안에는 이미 은밀하게 움직이며 시작하는 무리가 있었다.

 

 

                                                    비운의 왕비였던 광해군의 부인 유 씨(영화 광해 중에서)

 

또 한 번의 천우신조의 기회가 다가오니, 반정세력의 말석에 끼어있던 이이반(李而攽)이 거사 당일 3월 12일 고명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거사를 위한 움직임은 차고 차곡 여물어 가고 있었다.

 

-李 貴와 김유의 무리들이 오늘 밤 홍제원에서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할 것이며

훈련대장 이흥립도 이에 동조하기로 되어있습니다.-

 

하늘이 무너 질 듯한 충격적인 고변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급하게 서두르는 기미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귀가 역모에 연루되어 있다는 풍설이 어디 한두 번 나돌았던 일이었던가, 더구나 李 貴는 스스로 변박 상소를 올려놓고 대죄하고 있는 처지였다. 중신들에게는 선뜻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으나, 거병의 시일과 장소까지 정해져 있는 터 이어서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승정원의

다급한 전언을 듣고 빈청으로 중신들이 모여들었다. 박승종, 유희분, 이이첨 등 당대 권력의 실세들과 금부당상( 禁府堂上) 등은 누구도 허둥거리지 않았다. 냉정해서가 아니라 조금도 두렵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이이첨마저 대수로운 일이 못 된다는 듯이 말하자 참여한 중신들은 이를 수긍하는 눈치들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당대의 옥사를 주도하는 일에는 그를 따를 자가 누구이던가 그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실로 왕조의 운명이 다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오늘이 반정하는 날이라면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라 하여 주상 전하께

고해 올린 연후에 하회를 기다리자고 영의정 박승종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

 

광해군은

그날도 주연장(酒宴場)에 있었다. 이날의 주연은 반정 주체인 김자점의 농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광해군의 주연은 이제 중신들도 혀를 찰 만큼 심하게 난잡해져 있었다.

오늘만 무사히 넘긴다면 거사는 성공할 수 있었다. 계략에 비상한 재간을 갖은 김자점은 술과 안주 그리고 적지 않은 패물을 개시 김상궁의 사가(私家)에 이미 보낸 것이었다. 개시 김상궁은 패물을 챙기고 주연을 열었다. 그리고 김자점의 충절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면서..

그것이 마지막 죽음의 향연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승지 이덕형은 오늘의 거사 일이라는 것을 왕에게 고하기 위해 주연상을 찾았다. 정색을 하며 다가온 개시 김상궁은 쪼르르 광해군 곁으로 가 오늘이 거사 일이라는 승지의 전언을 고하니...

 

여흥을 깨 기분이 상하였는지 광해군은 李 貴를 파직하는 것으로 이르럿건을 그런다며 미간을 찌쁘리면서, 과인의 명 없이는 단 한 사람이라도 군병을 움직일 수 없음이라며 당장 가서 이르라 하니...

 

승지 이덕형은 눈앞이 어른거리며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등을 돌렸다.

끝장이 나려나 보다... 속으로 되뇌면서.

 

.

 

말년의

광해군은 지쳤던 것일까?

임란(壬亂)의 고행, 우연 곡절 끝에 오른 왕위.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을 죽게 한 폐모살제(廢母殺弟), 친형 임해군을 사(死) 하고 혈족과 친족을 죽음에 이르게 한 처사... 반대를 무릅쓰고 끌어온 궁궐 건축 사업. 역시 비변사 신료들을 어르고 달래가면서 힘겹게 끌어온 대명 정책....

 

그도 지치고 힘들었으리라. 말년에는 권력의 중추돌이였던 이이첨과도 왕권을 압도하려는

그였기에 마음으로 결별하고 주변에는 믿고 맡길만한 확실한 측근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러다 보니 소심해지고 우유부단해지며 자신의 지켜줄 마지막 보루인 경호책임자인 훈련대장을 6년 동안 11번이나 교체하게 되었다. 불행의 전주곡이었다.

 

 

밤은 2경을

지나고 어둠이 내려 누르고 있었다. 광해군 치세의 마지막 밤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달빛에 젖은 밤하늘에는 어두운 구름이 가리고 춘 3 월 열 이틀 달 빛도 빛을 잃어 어두웠다. 어둠은 반정세력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하늘이 돕는가 보다.

 

 

廢母殺弟(폐모살제: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임.)

背明親金(배명친금:전통적 우호국 명을 멀리하고 오랑케인 금나라와 친교함.)

大型宮闕建築(10여년간에 걸친 대규모 궁궐 건축 공사로 민생을 파탄시킴.) 을

                      반정(反正) 구호로 이귀. 김유 등의 반정 주체세력들은 새 시대를 위해 궐기하게 된다.

 

장단 부사 이서(李曙)는 장단에서, 이중노(李重老)는 이천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집결지가 홍제원(弘濟院)에서 변경된 모화관에서 반정 군의 수장(首長) 김유(金瑬)의 병력과 합류하고 이 무리를 도포 속 이미 어포(御袍)를 받쳐 입은 능양군(綾陽君)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李适)을 선봉장으로 1623년 3월 12일 깊어가는 밤 어둠을 뚫고 창의문(彰義門)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반정 직후 부인 유 씨,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아들 부부와 함께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목숨만은 겨우 부지한 채 혈육과의 생활이 보장되었지만 강화로 옮겨진지 얼마 안 되어 부인과 아들 부부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된다.

 

폐세자 지는 연금된 집 마당에서 땅굴을 파고 탈출하려다 나오자마자 발각되어 잡혀 인조의 명으로 자진(自盡) 하게 되고(26세), 폐세자 빈도 충격에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 뒤를 따른다.

1623년에는 광해군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48세) 이제 남은 혈육은 출가한 딸 하나뿐이었다. 이 충격에 광해군마저 몸져 눕게 되었다.

 

폐위된 뒤 강화도와 제주도로 유배지를 전전하면서 광해군은 권력무상과 인생무상을 출렁이는 파도와 무심히 나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절절히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처절한 신분의

추락과 자식과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야만 했던 심정은·····,

 

아마도 업보라 생각하고 초월하지 않으면 감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송하던 별장들에게도 모욕을 받고 귀양지 제주도에서는 시중드는 계집종에게도 영감이란 소리를 들으며 면박을 받았다 하니 아마도 세상이 흘러가며 변하는 모습을 체념하고 관조하듯 바라보았으리라.

 

 

 

.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서울의 친지는 생사조차 끊어지고

안개 낀 강 위에 외로운 배에 누웠네"

 

-유배 중 제주에서 쓴 광해군 시 중에서-

 

 

 

그런 와중에도 모진 것이 목숨이라 했던가! 폐위된 이후에도 그가 영화를 누리며 왕위에 있었던 기간(15년) 보다 더 오랜 세월 19년을 외로이 살다 갔다. 광해군(67세)은 1641년(인종 19) 옅은 한 여름 뭉게구름이 솟아나는 7월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눈을 감는다.

 

죽기 전 어렸을 때 사별한 생모(生母) 공빈(恭嬪) 김 씨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인목대비가 1632년 49세로 승하한지 9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의 부음을 듣고 제주 부사 이시방(李時昉: 인조반정의 주역인 李貴의 둘째 아들로 반정에는 형 이시백과 함께 참여하여 2등 공신으로 후에 호조판서에 오른다.)이 들어갔을 때는 계집종이 혼자 염(殮)을 하고 있었다 하니 한때는 산천초목을 떨게 하던 왕이었지만 운명할 당시에는 그의 처지도 여념 사람의 그것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한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인지····, 돌며 순환하는 것인지····,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인지····, 만들어가는 것인지····,

 

 

 

 

자료: (daum ,naver,위키) 지식,백과,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KBS 스페셜, 왕이 된 남자 sit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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