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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에 오면

silknet 2022. 11. 17. 23:23

 

 

음악 : Loney Shepherd (외로운 양치기)

연주 : Gheorghe Zamfir(루마니아)

작곡 : James Last

협연 : James Last Orchestra

 

 

 

경의선  

전철을 타고 도심을 떠나 모처럼 느끼는 여유로움 속에 잠기다 보면,  

어느새  북부 신흥도시로 발돋움하는 문산역에 도착하게 되고. 도심에서 자동차를 이용하면  자유로로 이어지는 문산 당동 IC에서  다시 37번 국도에 접어들어 잠시 주행하면, 임진강변  황포돗대와 경순왕 IC로 나오게 된다.  이곳에서 파주와 연천을 가르며 흐르는 임진강을  건너면  연천군에 들어오게 된다. 

  

자연이 잘 보존되어 숨쉬는 청정지역인  이곳은  장남면으로 시작해  백학면, 미산면 등 주로 군사보호지역으로 그간 제한에 의해  더딘 개발을 하여 왔는데 이제는 점차 완화되고 있어 그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변해 가고 있다.

한강 변을 따라 자유로를 숨차게 달려오다 보면, 문산의 끝자락 당동 IC에 도달하게 되고, 이곳에서 부터 시작되는 37번 자동차 전용도로에 접어들면  임진강변을 따라 펼쳐지는 자연 그대로의 미개발 상태의 본연의 모습에 접하게 되어,  도심에서의 누적되고 체증된 현대인의 스트레스도 일시에 날아가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를  즐기게 된다.

 

반복되는 정형적인 도시생활에 매여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무쳐있던 감성도 계절에 따라 어김없이 변하는 원시 자연의 비경에 ..... , 잠시나마 시간의 흐름을 잊고 메말랐던 감정에 촉촉히  젖어들게 된다.

                                      

                         

                                                              고랑포구에서 바라본 임진강 

               

현재 연천군 장남면은

1989년 백학면 원당출장소에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고랑포구는 옛부터  마포포구에 이어 중부 내륙지방 깊숙히 연결된  물길(한강,임진강)이 육로를연결하는 천혜의 교통의 요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제는분단의 아픔과 함께 시간의 흐름에 무쳐 무심한 강물의 흐름과 함께 잊혀가고 있다.                                         

 부근의 백학면은 민족을 갈라놓은 비련의 분단선 38선이 지나가는 곳으로써 백학면 소재지는 인공기가 걸려있고  그 아래쪽  전동리, 통구리마을 등은 태극기가 휘날리는 비극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제는 세계적 1,2위를 다투는 LED 및 화학단지 (월롱,문산)등과 연계하는 경기도 산하 지방공단(13만평)이 조성되어 있으며,  개발로 인한 물류량을 소화해내기 위해 연천군과 파주시를 연결하는장남대교와 비룡대교를 확장하고 이어  백학면에 이르는 기존 지방도로를  4차선 도로로 정비하여 건설 중이고  임진강변 산하 60여 만평에 골프와 위락단지가 강변을 굽어보는 학곡리와 구미리에 조성되어있다.

 

 

 1930년대 중부지방의 활달한 항구였으며 6.25 사변의 최대 격전지의 하나였던 이곳은 휴전을 앞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며 하루에도 몇번씩 주인이 바뀌며 산야가 온통 피의 능선을 이루며  흐르는 강물도 검붉게 물들였던 곳 이기도 하다.  

내륙 깊숙히 양안이 현무암의 절리로 이루어진 기암절벽의 천혜의 방어선이였지만 지금은 수 많은 세월의 자취와 함께 이루어진 수려한 자태의 자연의 신비를  우리에게 조심스레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고랑포구는

서해 바닷길에서 내륙으로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옛 부터 수운(水運)을 통한 중부 내륙지방의 물자교류로 번성하였던 나룻터인데, 이곳이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위치한 고랑포구 항구였다.

이지역에서 나는 장단콩, 개성인삼, 땔감, 곡물 등의 특산물과  내륙의 산물을 외부로 반출하고 외부에서 조기,새우젖 등 서해안 특산물인 어류와,소금 등 필요한 물자가 들어오는 내륙지방 깊숙히 위치한 농.임 특산물 집하장으로 번창 했던 곳이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삶에 무친 민중들에 휴식과 삶의 생기를 충전해주는 생활의 안식처로써 저잣거리 부근에 는 화신 백화점 분점과 상점,주막, 여곽, 민가들이 즐비 하였던 옛 자취들은 그 당시 이곳이 얼마나 번성했던가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

 

연천군(시설관리공단)은 수년간에 걸쳐 사업비 11,200백만원(국비 5,600만, 군비 5,600만) 들여, 면적 46,521㎡(14,070평)에 지하1층,지상2층,연면적 2,868㎡(868평)의 규모로 문화 및 집회시설을 갖춘 고랑포구역사공원을  조성했다.

 

 

 레클리스는 6.25 당시 연천 전투에서 활약한 미해병대 소속 군마이다. 산악지형이 대부분인 한국 중부지역 전투에서 탄약공급에 어려움을 겪던 미해병대는 경주마 '아침해'를 군마로 투입한다. 전장에서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Reckless)임무를 수행한 '아침해'에게 '레클리스'란 이름을 지어 주고 정전협정 후 미국으로 데려가 1959년에는 미 역사상 처음으로 하사관으로 진급시킨 후 훈장을 수여했다. 역사박물관 전면에 서있는 기마상이 미국에서 공수해온 '레클리스'동상이다.

 

 

역사공원 내에는 고랑포구의 역사와 지리적 특성을 생생하게 구현, 재현하였다. 가상(VR),증강(AR)현실을 통해 실감나는 역사 및 안보 체험이 가능하며 어린이들의 놀이공간과 다목적공간(식사장소 포함)및 세미나실로 이루어져 있다. 총 4개의 안내 및 관람구역으로 구성되었으며,관람은①만남의 찰나②삶의 찰나 ③역사와 문화의 찰나④오감의 찰나로 이루어져 있다.

 

 

부근에는 1968년도  당시 우리국민들의 가슴을 들었다 놓았던  했던 김신조 무장공비(1.21사태)침투로가 있는데 ,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국을 되새기는 안보관광  차원과  연계하여 새로운 역사,문화,체험의 공간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1.21.사태는                                                                            

1968년 북한 특수부대인 124부대 소속 31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지금의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저지대 지형을 이용해 침투한 사건이다.            

이들은 1.17. 20:00 북방한계선을 출발하여 야음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통과하고 3시간만에 남방한계선인  현위치(반정리)에 도착 그 추운 한겨울 꽁꽁 언 임진강을 도하하여 파평면 장파리에  이르게된다.    

 

31명의 무장공비들은 고된 행군을 이어가, 파평산과 북노고산 앵무봉, 남노고산 비봉을 거쳐  우리가 평화롭게 따뜻이 잠든 한 겨울 밤, 눈덮흰 험한한 산악을 상상할 수도 없는 빠른 행군속도로 수도권 중심까지 신속히 잠입하였다. 얼마나 혹된 훈련으로 단련되였는지 그들의 예측치 못할 침투속도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준비는 치밀했던 것이다.     

 

                                                               

1968년 1월16일 밤10시. 황해북도 연산군소재  124부대에서  한대의 버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는데.

이속에는 31명의 남파 특수공작원들이 타고 있었다. 목적지는 개성 남동부에 위치한 남파 공작원 초대소.

남조선 해방을 위해 그 심장부에 비수를 꽂으라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선별된 특수 공작원들은 떠날때의 부대장의 구호를  머리에 되새기며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올 때의  암호인  "611" 을 마음속에 간직한채 암흑과 같은 침묵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네들도 사람인지라 과연 살아가 그리운 고향과 가족들을 볼 수있을까 하는 하나의  실같은  희망의 빛을 간직한채 목숨을 건 중대한 사명 속에 복잡한 상념이 온몸에 흐르고 있었으리라..                 

 

       

그들이 북방한계선을

넘은 시각이 밤 9시, 비무장지대 그네들이 치밀하게 개척해 노은 안전지대를 따라 침투를 시작하였다. 

예상 침투지역은 미군 2사단과  한국군 25사단 관할지의 경계선 부근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관할지역의 취약성을 이용해 이 지점으로 침투로를 정하고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긴장된 손으로 차가운 철조망을 헝겊으로 두르고 서서이 절단하기 시작하였다.                                                      

 

그 한겨울 추위속에서도 온몸에 식은 땀이 흐르는 긴장된 시간이 지나고 이 지역을 무사히 통과하여 임진강이 바라보이는 지점인 반정리에 도달하게 된다. 당시 서부 철책선 경계임무는(고랑포지역) 미 2사단 과 우리군 25, 26사단 관할이었다 한다. 우리 군은 249 km 휴전선 전 지역을 철조망 방어시설로 구축하였으나 미군 관할인 4km지역은 제외되었는데 .이 지역운 미 2사단이 미군들의 전자감응 자체 장비로만 설치되고 있었다.                                           

무장공비들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아래 정보를 입수하여, 미군지역과 우리 군 경계지역을 교묘히 이용해 침투하게 된다. 현재 우리군 만의 철통같은 경계에 비해 당시 관할지역의 분리로 좀 느슨하였기에 그들의 침투가 가능했으리라 본다.                                       

 

이들은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쌩생 불어되는 강바람을 맞으며 꽁꽁 얼어붙은 강위를 조심스럽게 건너기 시작해 19 일 밤 이곳을 통과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파평산 봉우리를 보면서 전력 질주하여  파주시 법원리 삼봉산 기슭에 도달해  숙영을 하게 된다.         

                                              

                                                        철책선을 침투하는  무장공비 (1.21.사태 침투현장 모형도) 

 

최초  우리측에

동태가 포착된 것은  1.19 . 21:00 파주시 법원리에서  민간인  우씨 성을 가진 젊은 나무꾼 4 형제의 신고였다..  20 대 전 후반의 이들은 법원리 삼봉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오후 2시경 야간 침투로를 탐색 나온 정찰조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들은  그 당시 26사단 마크를 단 한국군 복장으로 이들 4형제를 이끌고 그들 야영지로 끌고 간다.  우연 곡절 끝에 저녁 때가 되어서 공비들은 비밀리에 군작전을 하는 한국군이니 발설하지 말라는 협박아닌 경고를 하고 우씨 형제들을 무시히 풀어주게 된다.                      

 

우씨 형제들은 이들을 처음 본 순간 이상한 감을 직감하였다 한다. 한국군 복장인데 신발은 검은 농구화 차림 이었으며 어눌한 함경도 사투리를 가끔 쓰기에  우리 군인들은  아니라고 직감하였다고 한다. 하여간  이들에게서 여러시간 동안 갇혀 있다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때 쯤  하늘이 도왔는지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움의 문턱에서 풀려나 돌아 오게 된다.                                     

 

무장공비들은 그 형제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보이냐고 묻기도하여, 한국군 같다고 대답하여주니 이어 하루에 밥은 몇끼나 먹느냐고 묻기도 하였다는데, 3끼를 꼬박 다 차려 먹는다 하자 그들도 인간이었던지 의아한 묘한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형제들은 마을로 내려와 즉시 단양 우씨 종갓집으로 달려가, 종친 어른들과  함께 파주군 법원읍 창현 파출소에 신고 하게된다.  그때가 1.19 밤 9시경 이었는데 인근부대에  9시 30분경에 전달되고 3시간 지나서  대간첩 작전 대책위원회가 설치된 합동참모부로 자정무렵이 되어서야 보고 되었다.   

 

             당시 침입로를 설명하는 김신조 목사             

 

 

31명의 무장공비들은

발길을 재촉해 노고산을 넘어 송추계곡에 이르게 되는데  벌써 군,경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네들은 설마했던 신고가 들어갔음을 직감하고 행군을 더욱 재촉해 진관사 계곡을 따라 북한산 등선을 타고 비봉에 도착한 때가 20일 새벽 5시경이었으며 기온은 영하 20도를 오르내리고 있었고 체력소모도 예상보다 심했다 한다.                     

이들은 20일 낮에는 숨어 쉬고, 저녁 8시경 마지막 숙영지인 북악산 기슭으로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새벽까지는 북악산 최종 숙영지까지 도착해 있어야 했다. 그 들은 지금의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부근를 최종 숙영지로 삼고 이곳에서 청와대 뒷산으로 침입하기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군사작전으로 볼때 무장한 병력이  급속행군은 주간에  평지에서 시간당  10여 km정도이고 야간산악  행군일때는  4km/h로 보는데  이들은 시간당 10km의 무서운 속도로  그것도 야간에  법원리, 미타산, 앵무봉과 노고산 그리고 북한산 자락인 진관사 기슭인 산자락을 푹푹 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을 아무런 저항없이 치열하게 훈련했던 산악 구보를 통해 도달하게 된다.   그것도 능선이 아닌 잠행을 위해 산 7부 능선을 탄 행군이었다. 이들은 나무꾼 형제를 풀어주고 더욱 빠른 행군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미 다 지나간 곳부터 우리의 철통같은 비상망(?)은  쳐지게 된다. 

                                                                                                      

 

세상일 살다 보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문명의 역할을 간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발전해온 과학과 성숙된 문명의 힘으로 우리가 그 혜택을 보고있는 사실 아래에는 무섭도록 그것을 바쳐온 각 분야의 꾸준한  진보되고 전문화된 힘이 지탱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곳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 치밀하고 계획된 일들도 어느한 순간의  헛점에 의해 무너지는 사실들..  이는 우리가 과학의 힘으로 분석한 지식보다 경험상에서 우러나는 지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있다는 것이다.  그네들도 얼마나 많은 혹독한 훈련과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이곳까지 왔으나  그들에게도 허점이 있었던 것이다.                                                     

 

사건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조우한 우씨 형제를 죽여야 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로 그들 상호간 의견의 충돌이 있었으나, 큰 거사(!)를 앞두고 조그만 피는 거두고 풀어주자는  인간적인(?) 다수의 결정으로 과오(?)를 범했다고 한다.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본부에 보고한 후 공교롭게도 수신되는 암호는 해독되지 않고 있었다.무선교신에 이어 소지한  트랜지스터 라듸오를 통해 아리따운 여성의 입에서는 계속 숫자를 토해 내고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소지한 암호문으로 해독이 되지 않고 있었다.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 내용은 "원대복귀, 원대복귀" 였다 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나무꾼 형제 중에는 현직경찰로 근무하였던  분도 계신다는데 천우신조라는 말이 이때가 적합한지 아닌지 ..., 하여간 그때나 이때나 우리 민초들의 역할은 이 사회를 지키는 밑거름이 되고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주어야  할 것 같다..   이 사태로인해  하늘의 별도 떨어지고 땅위에 별도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이들 무장 공비들은                                                     

1. 19.  오후 8시경 우씨 형제들을 풀어주자마자 법원리 뒷산을 출발하여 목적지를 향해 급속 산악 행군으로 들어가 행군이 아니라 전력 질주로 한겨울 눈덮인 산을 타기 시작한다.                        

우리 측 정보망에 불이 튀기시작 할 무렵, 무장공비들은 앵무봉을 지나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 능선을 타고 있었으며, 새벽 4시경에는 노고산을 주파하고 서울의 경계선이자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진관사를 통과하여 오전 6시경  수도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북한산 비봉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십여 시간을 거의 휴식조차도 없이 눈으로 푹푹 무릎까지 빠져오는 야간 산악 길을 행군이 아닌 전력 질주로 중무장한 31명의 전투병력이 곤히 잠든 밤하늘에 우리 "코" 앞에서 같이 동거(?)하게 된것이다.              

이들이 지나간 곳에서 그제야 우리의 철통같은 방어선이 따라붙기  시작해  야단 법석으로 난리를 치르고 있었다.       

무장공비들도 인간이었던지라 체력소진에 의한 힘의 저하로 밤새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 속을 악전고투하며 도착한 곳이 눈덮인 승가사를 바라보는 북한산 자락이였다.  이들의 최종 숙영지며 공격 출발점인 곳은 북한산이 아니라 그 앞에있는 북악산 이였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소름 끼치는 불행의 진혼곡 이였으며,

우리들에게는 식은 땀이 흐르는 행운의 전주곡이었으리라........,

 

목적지인 북악산은 멀었는데 날은 밝아오고  헬기가 소음을 내며 산 주위를 나돌기 시작하니 이들에게도 공포가 엄습하게 되었는지.  할 수없이 계획을 변경하여 산행을 포기하고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저녁 8시경 산을 내려와 최종 목적지인 청와대로  접근하기로 하였다. 계획된 정해진 시간(일요일 저녁)에 산행으로는 도저히 목적지에 접근할 수 없기에  공격 루투를 변경하여 산에서 내려오게 된다.그들 계획대로라면 북악산 최종거점(현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에서 청와대 뒷산으로 침투하기로 되어있었다.         

                      

     

         현재 자하문 내리막 길     

 

1.21. 일요일 밤 8시경 ,북한산 비봉에서 마지막 공격준비를 갖추고 밤 9시경 북한산 기슭을 내려와 도로에 접어 들게 된다. 군복을 벗고 준비한 민간인 복장인 긴 외투를 걸치고 그 속에  중무장한 기관총과 수류탄을 소지한 체 일렬로 한 걸음 한 걸음  청와대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었다.      

 

                                                                                        청와대

이들은 갑호 비상령이

 떨어진 서울 시내 세검정 길까지 접근하여 2열 종대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일요일 저녁이고 비상경계령으로 거리는 한적하였다.  이 괴한들이 처음으로 꼬리가 잡힌 것은, 수상한 무리가 구평동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세검정 쪽으로  걸어 내려가고 있다는 현지 경찰의 시경으로  숨가뿐 급속한 타전이었다.           

당시 서대문 경찰 이각현 서장과 일행이 급파되어 이들을 선두대열에서 저지하며 검문하자 이들은, CIC(당시 방첩대)대원들이며 훈련을 마치고 청와대 근교에 위치한 원부대로  복귀한다고 고압적인 자세로 대꾸하며 행군을 지속하자, 경찰은 급히 상부로 조회하고 이들을 소수의 병력 (6-7명 경찰)으로 지령을 기다리며 경계하고 있었다.            

 

피가 마르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무리가 관할지역을 넘어가자 당시 관할인 종로경찰서(최규식서장)에 검문에 응하지 않는 괴한들의 신원확인의 동태를 재차 보고하자 밤 10시경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자하문 내리막 길에 당당한 체구의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이 지프를 타고 일행과 함께 달려와 길을 가로막고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권총을 뽑아들고  한발자국도 못간다고 제지하자..   

 

극도의 신경이 날카로와진  무장공비들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충혈된 눈동자를 반짝이며 외투 속 총기를 손으로 더듬거릴 때,  마침 일요일 마지막 노선 버스가 종점에 도착하면서 그들의 뒤에 전조등을 밝히며 주행을 멈추자  이들은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                                                                         

 

앞을 가로막고 저지하는 최서장의 가슴을 향해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해 "국방군" 이다 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인근 버스에 슈류탄을 던지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게 된다. 그때가 밤 10시 15분경 당시 36세의 최규식 총경은 가슴에 수 발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지게 된다. 첫 우리측 의 희생자 였다.     

   

      고 최규식 경무관

 

총성이 퍼지자                                                                 

그 당시 청와대 외곽경비를 담당하던 수경사 30대대 병력들이 쏜살같이 달려오기 시작한다.  당시 30대대장은 전두환 중령이였으며 그 아래 장세동 소령이 작전 책임을 맡고 있었다. 

두 장교들은 아시다시피 우리 역사에 큰 흐름을 장식하신 분들인데 객관적으로 볼때 우리의 현대 역사상 중요한 부분에 종종 나타나는 그러한 중책의  position에 자리잡고  있었다.                                                                      

평상시 꾸준한 훈련으로 즉시 81mm 포로 조명탄을 쏘어올려 그 부근을  대낮같이 밝히자 공비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 지게 된다.  준비된 자에게만 다가오는기회를  잘 적응하게되고 이로인해 빛을 보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언제나  준비하는자세 그 본분을 충실히 지키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뜻의로 보여진다.               

 

이시대에 살아가면서 가슴아픈 사연들이 수많은 별들처럼  많겠지만  길지않은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주어진 시간을  남들을 위해 보람있게 살아갈때  그 자취가 남게 되리라 여겨진다.   

하여간  이 사건 으로,

군,경은 즉시 소탕전을 벌여  1.20. ~ 1.31. 까지(12일간)  29명을 사살하고  1명은 생포 혹은 투항(김신조) 하고 1명은 도주하거나  사망한것으로 처리하여 사건을 종결하였으나, 우리국민의 혼을  왈칵 뒤집어 놓고 충격을 남겨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 이로인해 우리 측은 작전 중 15연대장 이익수대령과 그 날밤 현장에서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 민간인 등 5명이 사망하고 시내버스 4대 완파 와 승무원 등이 부상 당하는 심한 피해를  입었다. 

 

충격을 받은  우리 측도 부랴 부랴 예비군을 창설하였고 서해 실미도에 68△ 특수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훈련하여 북한에 대해 보복하려 하였으나 조성되는 남북화해 분위기에 무쳐 그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대낮 백주에 영등포까지 나타나 또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했던 버스 난동 사건이 이번에는 우리 측 실미도와 관련있었다 하니,  참  놀랍고도 애절한 감정이  마움 속에 스며든다.  전향한 김신조는 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거듭나 목사 안수를 받아 성직자로써 남은 여생을 이 나라에 봉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다.

 

                                                                                        경순왕 릉

 

고랑포구

에서 뭍으로 올라와 조그마한 야산 기슭(성거산)을 오르다 보면  수 백년 영화를 뒤로하고   역사의 수레바퀴 속으로 무쳐가는 신라 마지막 군주, 그리고 쇠약해져가는 나라를 바친 아비를 원망해서 인지  군주 못된 한이 서려서 인지 저린저린 가슴을 부여잡고  개골산(겨울 금강산)에 들어가   남은 생을  베옷과 풀입만으로  생을 마쳤다는 마의태자(큰아들)와 화엄사(삼국유사 : 해인사) 에  삭발하고 입적한  범용(막내아들) ,  이들의  부친이였던.......,

비운의 경순왕 릉이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머나먼 남쪽 고향  서라벌 언덕을  바라보며 무심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존의 명당터에  외로이 누워 이곳을 찾는 이의 가슴을 촉촉히 여미게 하고 있다.   

 

 

   ♣ 경순왕릉(敬順王陵, 사적 제244호)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소재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 ,휘(諱)는 부(傅)이며 제46대 문성왕( 文聖王)의 후손이다. 경주 포석정에서 유흥을 즐기다 견훤(甄萱) 의 침공으로 참살된 경애왕(景哀王) 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그 당시 신라 국력은 석양의 지는해처럼 쇠약하였다.곳곳에서 군웅(群雄) 들이 할거하였는데 특히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영토는 날로 줄어들며 기울어져갔다. 고려로 대세가 기울어져가자 경순왕은 힘없고 무고한 백성들이 약탈과 피해를 당하는 현실을 피하고자 고려 왕건(王建) 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주고 왕위에서 물러났다.경순왕이 경종(景宗) 3년 (978년)에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능이 마련되었으나그 후 오랜 세월 실전(失傳) 되었다가 조선 영조(英祖) 23년 (1747년)에 다시 찾게되었다. 왕릉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묘소의; 격식으로 재정비되어 능표(陵表) ,양석(羊石) ,장명등(長明燈),망주석(望柱石)등이 이때 마련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경순왕의 운구(運柩)행렬이 경주로 가기위해 이 곳 임진강 고랑포에 이르렀을때,고려 왕실에서 경주지역의 민심을 우려하여"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없다" 라는 이유로 운구행렬을 막았다 한다. 결국,왕릉은 이곳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잡게됨에 따라 신라왕이였던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난 왕릉이 되었다. 

 

 

경순왕(敬順王)은                                                               

927년, 당시 선왕인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유희를  즐기다  후백제 견훤에 의해 참살 당하고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  신라 제 56대  마지막 왕으로써 (927~935: 재위기간)   그 당시 판도는 침공을 일삼는  후백제, 신흥세력으로 발돋움하는 고려, 기울어져 가는 신라로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고,

후백제의 잦은 침략과 신라 지방호적들의 군웅활거로  나라는 쇠약해 질때로 약해져가고 있었다. 그당시

민심은  왕건의 신흥고려에 기울고 있어 경순왕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지막 어전회의를 거쳐 고려에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주기로하고  왕위에서 물러나  43년 간 이나 긴 세월을 고려왕족(왕건의 부마,경주사심관)으로 살아갔다. 

얼마나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으면  수백년을 이어왔던  한나라가 제대로  한번 대쳐하지도 못하고   그  급박했던 상황 속에서도 주지육림속에 날벼락을 맞고 적의 칼에 쓰러져 갔다는 것은 그 당시 신라 조정이  얼마나  민의와 떨어져  쇠락해져가고 있었는가는  후대의 우리들도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바 있어  씁씁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태조 왕건의 릉 (북한소재)

 

하여간  견훤과 왕건의 갈림 길에서 경순왕의 발길을 고려로 이끌게 한 크나큰  역사적 선택은  행인의 옷을 벗기려는 바람의 강한 힘보다  햇살의 더위가 스스로  행인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속담처럼 왕관까지 씌어준 칼의 힘(견훤)보다  건국 초  선정을 지향하는 왕건의 품으로  이끌렸을 것이다.

포석정 참살로 경순왕을 비롯한 신라인들은 견훤에 원한을 갖고 고려 왕건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는데 경순왕은 고려 왕건을 만나 의사를 타진코자 931년 사신을 보내 그를 경주로 초청하게 된다. 이에 왕건이 흔쾌히 승낙하여 역사적 경주회담이 임해전에서 열려 잔치를 벌이게 된다.

 

이자리에서 경순왕은 "신라가 하늘의 버림을 받아 견훤에게 유린을 당해 분통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니 이에  왕건 역시 눈물을 흘리며 경순왕을 위로 하였다고 한다.

 

왕건의 마음을 읽은 경순왕은 4년 후 935년 스스로 신라 유민을  이끌고 개성으로 가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 바쳐 민족적 계승을 이루고자 하였다. 민심은 천심이고 천심이  곧 민심이라는 이와같은 사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생생히 터득한 진리이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한 걸음씩 밝은 미래로  나갈 것이다. 

 

순왕은 귀부 후

정승공에 봉해져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덛부쳐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고  오랜 세월을 살아갔다하나,

그 기나긴 세월을  얼마나 많은 상념 속에 살았는지,   그 저리고  애타는 말못한  한많은 업보는 다 어떻게 이고 갔는지..  그 누가 알랴마는 돌아갔을 때는, 당시 개성의 주민 2/3가 경순왕을 따라온  신라유민들로써 그들에 의해 옛 군주를 경주에  모시려고  하였건만, 고려 조정의  왕의 구(주검)는  도읍 개성을 벗어나  100리 밖으로는 나가지 못한다 하여, 그리도 한 많은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개성에서  100리가 못미치는 이곳 고랑포리 성거산 양지바른 터에  왕의 의식을 갖춘 장례를 치루었다 하니, 

 

혼이라도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리운 고향 바다로 흘러흘러 갔는지, 아니면  멀리 그렇게 보고싶던 고향 산야로 나래를 펴  훨 훨 날아갔는지 그저 흘러가는 강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심히 흘러만 가고  있다.

  

무엇보다 수백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녔던 나라가  한나라에 흡수되어간  역사적 사실은 투쟁과 고통만을

피하려는  나약 함보다도  신라의  통일 정신을 신흥으로 부상하는 고려에 계승시켜 민족적  화합을 이루려는 대승적 견지에서 우러난  핏줄의  끌림이였을 것이다.

 

좌로부터 ;오두산성, 무장공비 침투로, 경순왕릉, 호로고루성, 육계토성, 칠중성,숭의전, 당포성, 은대리성

 

                                                       

  오두산성 (백제,사적 제351호.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8.)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돌출지점으로  서해에서 한강과 임진강을 통한 물길을           

      장악할 수있는 천혜의 요지.. 조선 초기 지형이 까마귀 처럼 생겼다하여 까마귀 오자와

      섬도를 써서 '오도성'이라 부르다가, 그 이후 자라 머리모양 같다하여 자라 오자와 머리

      두를 써서 '오두산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북녁땅을 바라보기만 하는 통일전망대가 자리하고 있음.

 

                                                                                         오두산성

 

 1.21 무장공비침투로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산13.)

북에서 남으로 통하는 분지같은 지형으로 이곳을 뚫고 임진강을 도하하여 파평산으로

잠입 하였음.   민통선내에 위치하여 신청에 의해 견학이 가능함.            

 

1.21.무장공비 침투로 현장 모형도

 

 

♣ 경순왕릉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사적 제244호).

   임진강을 바라보는 성거산 기슭에 위치한 높이 약 3m, 지름 약7m 원형  봉투무덤으로      

  주위에는 판석으로 둘렀으며 고려 왕릉에서 보여주는 곡장 담장이 둘러져 있어 고려 왕실이 

   왕의 예로서  장례를 치루었음을 나타내고 있음.

 

                                                                                       경순왕릉

 

 

♣  호로고루성 (고구려.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9. 사적467호.) 

  임진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있는  현무암의 수직단애 절벽위에 위치하며 지형이 조롱박 같다하여  '호로고루'  또는 마을을 뜻하는 '호로'와 성을 뜻하는 '고루'로 마을성을 의미하여 '호로고루'라고 불리기도 하였다함..

임진강의 두지나루에서 휘감겨져온 물길이 이곳에서 돌아 나가며 낮은 여울목을 이루어 도하하기 쉬운 천혜의 지형으로서 한국전쟁 당시 남침하는 북괴군의 주력 탱크부대가 도하하였던 지점이기도 함.

 

 

                                                           해바라기 꽃들이 만개한 호로고루 들녁

 

 

 통일을 염원하는 해바라기 축제

작열하는 한여름의 더위를 듬뿍 머금고, 가슴에는 스미는 서늘한 강 바람을 맞으며, 뽀갤질 듯한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에서 영글어가는 해바라기 꽃 들이 펼쳐지며 장관을 이루고 있다.  9월 이맘 때가 되면 이곳 호로고루 성지에는 만개한 해바라기 꽃들이 무거운 진 노란 머리를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황금물결로 출렁거린다

 

이곳에서 매년,장남면 주민자치위원회 주최로 '평화통일을 노래하다'는 슬로건으로 호로고루성지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해바라기 둘레길 걷기, 통일바람개비 만들기, 고구려 개미무사 체험 등 다체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되고,관람객의 흥을 돗으는 문화공연 등이 행사기간내에 열린다.

장남면 특산물인 고려 개성 인삼으로 요리한 각종먹거리(인삼해바라기비빔밥,인삼튀김,인삼막걸리)를통해 주민들의 흥겨운 자발적인 참여와 특히 이곳 특산물인 인삼 관련 제품과 해바라기 상품등의 농, 특산물 직거래장터도 성시를 이루고, 통일바라기 사진공모전, 설치미술전도 개최된다.

 

 

남녁으로 흘러가는 임진강 물줄기

 

통일 바라기는 통일을 염원하는 연천군 장남 주민들의 특허인 연천군의 브랜드로 통일바라기 동산의 호로고루 유적지를 보호하기위해 민,관,군이 함께 가꾸고있는 화합과 소통의 휴식공간이다.

 

연천군은 호로고루 성지부근을 더욱 정비하여 가꾸어 나가고, 고랑포구에 건립된 역사박물관 공원과 함께, 역사 탐방길로 경순왕릉과 안보관광으로 김신조 침투로 이어지는 태마공원으로가꾸어 나갈 것이다.

 

                                                                                      호로고루성

                                                          

                                                   호로고루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 여울목                                           

 

육계토성 - 백제. 파주시(제217호 기념물) 적성면 주월리 육계동 산99.

고구려 호로고루 성과 대치하였던 대표적 백제토성으로 육계는 여섯개의 계곡을 뜻하며

남과 북을 통하는 중요한 길목으로서 한국전쟁 시 북한군 탱크가 도하한 지점이기도 함.  

지금은 그때의 모습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듯 하여 찾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육계토성

         

                                                   

  ♣ 칠중성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산148. 사적 제437호 ).

감악산 줄기인 중성산(149m) 기슭에 임진강의 흐름이 훤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함. 

최초 백제가 축성하였으나 고구려에 이어 신라의 세력권으로 넘어갔다고 함.                 

 

 

 

♣  숭의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10. 사적 223호).

임진강을 굽어보는  누에머리 모양의 잠두봉  수직암벽  봉우리에 위치하는 고려의 실질적인 

종묘로서  태조 왕건을 비롯한 역대 국왕과 공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음.

 

                                                                                숭의전                                                                                            

 

 

당포성 (고구려,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782. 사적 제468호.) 

 임진강 북안  양주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목인 당개나루터에서  임진강과 당개샛강(임진강 지류)이  만나는  현무암의 수직 절벽위에  위치함. 삼화교는 문산에서 전곡까지 확장되는 국도로써  건너 동이리에 동이 IC가 생김.    

                                                                      

                                                                        당포성

 

 

 은대리성 (고구려. 도기념물 제197호.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82-14 )

           장수왕 때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하는 삼각지형에  축조하였으며

           보루는 600m이하의 작은 산성으로 이루어져 있음.        

                                                                                           

                                                                                  은대리성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미산면 아미리 부근 강변 절벽에는 고려의 창업주인 왕건의 사당 숭의전이 있는 것을 보면 역사의 한 모퉁이 서있는 우리들로서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참 묘한 감정에 젖어들게한다.                                                                                                              

 

 

 

숭의전은 고려 태조와 공신들을 모신 사당으로 흘러가는 임진강물을  굽어보며  나즈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고려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이전 태봉국의 장군 시절에 개성에서 궁예의 도성인 철원까지  배를 타고 왕래하며 쉬어가던 곳으로 임진강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 드리운 곳인데,  당시에는 앙암사라는 사찰이 있어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통일을 기원했던 도량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고려 태조,현종,문종,원종의 4왕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고려 충신 복지겸,홍유,신숭겸, 개국공신,유금필,배현경, 거란을 물리친  서희,강감찬,윤관,김취려,조충,  홍건적과의 공을 세운 안우,이방실,김득배 고려말 충신 정몽주 그리고 김부식, 김방경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고려말  왕씨 문중들은 

이씨 조선을 거부하고 순응하지 않고,  전 왕조(고려)를  흠모해 갖가지 설움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충절을 지켰기에,  차츰 조선 왕조도 고려 유민을 무마키 위해  이들을 예우하는 포용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수백년의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넘어 이렇게 자랑스러히  이어져 가는 것이야 말로, 사람은 가도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 듯 하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이시대의 우리들로서는 힘있고 풍요로운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의  여유로움을 타인을 위해 베풀고, 민초들도 자신을  돌아보며 소박한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때  후대에  의미있는 자취가  남게 되고, 그 때나 이때나  시대를 떠나  화합과 포용이야  말로  모두가 살고 발전하는 지름길이란  삶의 지혜는...당대를 사는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임진강이 흐르는 연천 들녁과 산야

 

이곳은  4c 말 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고구려의 세력과 백제, 신라의  3국이 충돌하는 전략적 요충지 였다 한다.  475.  장수왕의 백제수도 한성을 유린 할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은

고구려의 세력권  이였으나, 6c 중반부터 백제와 신라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임진강 유역에 고구려의 방어선이 구축되며  3국의 물고 물리는 치열한 힘의 각축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임진강 북단에 호로고루성, 당동성, 은대리성은 모두 고구려 요새 였으며, 강  남안에 육계토성, 오두산성은 백제,  그리고 신라의 칠중성은 다 전략적 요새로써 공격과 방어를 위한 요충지로써 구축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둘러보아도 그 위치나 모습이 손자병법을 몇번이나 탐독한 우리들 이지만 선조들의  지혜에  혀를 내두를 만큼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요새들은 한강이남에서 북쪽(개성)으로,  북쪽에서 한양으로 접근하는 최단거리에  임진강을 도하할 수 있는 낮은 여울목에  공격과 수비를 위한  전술운용이 용이한 곳으로,  주위에서 흔이 보이는 자연석을 가져와 수직단애의   천혜의 지형을 이용하여 효율적인  성곽(전초기지)을 구축한  전략적  요새였던 것이다..

 그러니  3국의 힘의 균형이 모두  반도의 중심부인 이곳에서 정립되고 있었으니,  아직 으르렁 거리는 북쪽의 힘의 세력과  2분화 되어 있는 현대의  힘의 균형은 어디일까도 궁금해 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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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평원 독수리(천연기념물 제243-2호)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3호)

          

 

 임진강은 

함경남도 문천군 풍산면과 강원도(북한) 법동군, 평남도 양덕군 사이를 지나는  마식령 산맥의 달악산과 고춘봉사이  말도 쉬며 넘어간다는 험한 고개  마식령 (768m)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향하는 예성강을  바라보며 남서쪽으로  물줄기를 돌려  강원도로 흘러들어 고미탄천과 만나고 경기도 북부에  들어와서  평안천과 한탄강과 조우하게 되고,

 

                           한반도 중심  로하스 연천.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류하는 마포리 부근이 한반도 중심 .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 삼원리 에서 발원하여  철원을 지나 연천 남계령 도감표에서 임진강에  합류하게  되고  이곳에서 큰 물줄기를 이룬  임진강은  연천,파주 평원에 풍부한 수량을 공급하며 산야를 휘감아 흐르다가  물줄기를 점점 넓혀가며 문산천을 지나  하류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장장 272km를 달려와  서해로  유유히  흘러 들어가고 있다. 

 

강물이 지나는 구비구비마다 온갖 사연을 안고  서해 대해에 와서는 그 기나긴 여정을 풀고 휴식을 취해도 되건만 야속히도 그  물줄기는 모든것을 품어안고  묵묵히 끊임없이  흘러  흘러 내려오고만 있다.

 

임진강 유역은 (2019년) 생물보전 지역으로, 한탄강 유역은 (202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완공된 장남대교

 

 

◆ 연천군은 경기도 최북단에 위치한 서울시의 1.2배 달하는 경기도 5번째 넓은 지역이지만, 인구는 42,000 여 명에 달하고 있다. 이는 D.M.Z(비무장지대)를 따라 32km에 접한 군사보호시설로 인한 지역 특성으로, 개발에 더디어왔으나, 수도권 최적의 생태관광 보고 지역으로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남북 교류 거점 도시로서 성장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2022년 새롭게 시작한 김덕현 신임 군수는 군정 비전을 담대한 도전,새로운 연천으로 , 군정 슬로건은 Yes, 연천 !으로 정하고 모든 이들이 'Yes"라고 말할 때까지, 자랑스러운 연천군의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자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표하고 있다., 이는 연천 발전을 위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담대한 도전정신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는 새로운 연천을 만들고자 함이다.

 

 

연천군 4대 방침

 

사통팔달 -- 수도권 전철 1호선 연천군 구간 직통화(동두천~연천역 20.87km : 2023.10. 개통 예정)와 서울~연천 간 고속도  로 개통을 통해 '육지 속의 섬' 연천군의 수도권의 접근성을 확보하고 관내 도로 망 신속히 건설하여 이동권 확보.

평생복지 -- 출생에서 노후까지 책임지는 생애 주기별 복지 시스템 구축을 통해,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건강과 어르신들의 편안한 생활을 보장함으로써 살고 싶은 연천, 삶이 행복한 연천 구현.

산업융합 -- 농축산업을 기반으로 산업 간 통합과 확장을 통해 그린바이오, 육가공, IT, AI, 첨단산업 유치로 양질의 일자리 제공과 인구유입 증대.

보전관광 -- 임진강·한탄강 유네스코 2관왕인 연천의 자연을 보호하면서, 관광 인프라를 체계적으로 리모델링하고, 연천군의 미래 먹거리인 문화· 체육·관광산업 확충.

 

 

 

연천군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중심에 해당되며 북위 38도, 동경 127도 교차점으로서, 이곳은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전곡읍 마포리 합수머리에 해당되는 곳이며 부근에는 호랑이 배꼽마을이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임진강 물줄기가 잠시 사행(s자)을 이루며 숨을 고르고 쉬어가는 이 지역은 파주 적성과 연천군 장남면을 연결하며 신설되는 관광 장남 대교(광폭 15미터)의 완공과 더불어 많은 방문이 기대되고 있는데,

 

연천군은 수도권 청정지역의 아름다운 환경과 자연 친화적인 개발로 산업과 자연과 옛 자취가 공존하며 발전하여 나가는 가장 이상적이고 전원적인 아름다운 고장으로 발전하여 나갈 것이다.

 

 

 

◆ 연천 명소

       ⊙ 한탄강관광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선사로 76)                 

                                                                                   ⊙고대산 캠핑리조트(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고대산길 84-12)

 

         ⊙한반도통일미래센타(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남계로 408)                  

                                                                          ⊙ 재인폭포(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부곡리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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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강 주상절리(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67-1일원            

           

                                 

         ⊙좌상바위(경기도 연천군 신납리 307)                                           

                                                                                                  ⊙역 고드름(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6번지)

 

         ⊙동막골 계곡(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동막리 동막계곡)           

                                                                            ⊙한탄강지질공원(전곡리유적,재인폭포,임진강주상절리)

 

        ⊙열두 개울(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 )                                                                     

                                            ⊙차탄천 주상절리

 

 

 

 

평화누리길·도보여행

        ♠고랑포길(10 코스)                                                                              

                                                               ♠임진적벽 길(11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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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이음길((12 코스)                                                                                                

                                                               ⊙ 자전거 길

           

  ♠ 차탄천 주상절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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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yeoncheon.go.kr/festival/index.do                                                                                

 

연천군청

 

www.yeon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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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연천군 홍보자료.,(위키,다음,네이버지식)백과

 

 

 

 

 

음악 : Loney Shepherd (외로운 양치기)

연주 : Leo Rojas(에콰도르,1984.10.18생, 남미 특유몽환적 신비로운 연주.)/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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