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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공작이 되어 날아가리

silknet 2022. 10. 9. 12:54

 

 

 

짜박.짜박..  짜박.짜박...

차디찬 궁궐바닥을 구르는 발자국 소음이 난무하는.. 늦가을 10월의 싸늘한 밤.

어둠 속에 무언가  적막을 깨트리며 바람을 가릅니다.

 

                                                                            명성황후

 

그슴츠레한 달빛에 번쩍이는 싸늘한 섬광은.. 총총히 나열된 총검 뿌리에서 뿜어져

나온 시퍼런 살기의 광기로 삭풍을 타고 날아치는 날랜 그림자가 구중궁궐 숙연한 

정기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때는 116년을 

거슬러 올라,  1895. 10. 8. 조선 고종(高宗) 32년 .

열강의 무리가 이 땅에 속속들이 세력(勢力)을  넓혀가는

혼돈과 격동의 순간..

조선의 왕궁 광화문의 육중한 문을 열어 제치고 일단의 무리들이

궁궐을 휘젓고 난립하며.. 이곳 저곳에서 폭도들의 괴성과 궁인들의

비명소리 속에 피가 난무하며 궁궐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권원궁내에서 황후를 끌어내  궁권내 뜰에서 시해하고 옥호루에

                                                 잠시 시신을 안차했다가 녹산남쪽 뜰에서 시해를 소각 함.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철종(哲宗)사후, 후사(後嗣)없는 그의 뒤를 이어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 이명복(李命福:고종의 아명)이 12 세의

나이로 우연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 말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황제{이재황(李載晃) : 제위 1863~97}이지요.

 

 

                                                                            대원군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은

어린 고종의 섭정(攝政) 으로 밀려드는 서구의 문호개방을 외면하고 문을

굳게  닫아버리는 쇄국정책(鎖國政策)을 실시하게 됩니다.

더구나 독일인 오페르트(Opeprt)가 부친 남연군(南延君)묘소 도굴사건과  두차례에 걸친

외세 침공(병인양요: 1868년 고종 3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프랑스군의 칩입과

문화재 약탈 등과, 신미양요 : 미국상선'셔몬'호가 대동강 유역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공격을

받고 침몰한 사건으로 도화된 1871년 미국 함대와의 강화도 전투 등 )등의 서구 열강의 위협 

대한 계기로 더욱 서양을 오랑캐로 보고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고 守舊政策

(수구정책)고수하게 됩니다.

 

 

고종의 비(妃)로 간택된 쇠락한 양반가 민치록(閔致綠)의 무남독녀 민자영은

대원군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閔씨의 눈에 들어 대원군의 외척배경이라는

정권야욕과 맞물려  왕비가 되니..

 

그때 나이 16세.

그녀가 바로 조선말 과도기 역사의 현장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만 했던 명성황후입니다.

 

                                                           시해 참여한 일단의 일본폭도들

 

 

1895. 10. 8. 새벽 5 시30분 경.

한발의 총성과 함께 여우사냥이라는

조선의 왕비 암살작전이 시작됩니다.

 

조선의 왕궁 경복궁 내에서는.. 희미한 달빛아래

울려 퍼지는 총성과 비명, 난무하는 칼날의 섬광아래 피와 살점이 튀기는

살육의 현장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1895. 10. 7. 밤. 

명성황후의 민씨정권에 대한 정권회복과 왕조 중흥 방안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대원군은 「조선의 영토를 한치라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의심없이 믿고 일본 낭인배들에 둘러싸여 입궐하게 됩니다.

 

일본 경성수비대의 보호아래 광기어린 폭도들의 무리는 조선 궁궐을 피로 물들이며,

광란의 살육을 자행하게 됩니다.

 

어린 임금을 사이에 두고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일찍부터 정치의 흐름을 알아보고

민씨 외척 중심으로 그와 대립하게 되는 영민한 왕비는..

신주류와 구주류사이의 힘 겨룸 속에서 자신의 정치 역량을 강화하나..

드디어 임오군란이라는 구식(舊式)군인 차별로 인한 곪아터진 사태로.

정권(政權)을 대원군에 물려주게 되고...

 

 

정치를 맛본 

여인의 집착된 의지는 청나라라는 외세를 끌어 들이므로

다시 정권에 정면에 서게 됩니다.

결국 민비는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게 됩니다.

청나라로 압송된 대원군이 절치부심하는 사이

민씨 정권은 야망으로 점철된 껄끄러운 일본을 멀리하게 되고

새로운 힘의 세력으로 부상하는 러시아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승전물로 요동반도 등을 넘겨받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국제적 간섭으로 (삼국간섭)

요동반도를  포기, 다시 청에 반환하고, 전쟁배상금을 좀더 증액하여 받는 선에서..

청일전쟁의 대승에 취해있다 일격을 맞고        

열강의 압력에 일단 물러 서게 됩니다.

      

 대동아 진출의 거대한 큰 그림을 그리던 일본으로는

그들의 뜻을 읽고 멀리하려는 조선의 영민한 왕비가

눈엣가시 였겠지요.

 

                                                 이또히로부미와 주한공사 이노후에와 미후라

그 당시 일본은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일황 직속의 군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大本營)과

원로수구(元老守舊)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하는데,

대본영 육군 수뇌부인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육군대장, 야마가타 아리도모(山顯有朋)

육군대신 등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내각을 통해

 

 

일본공사를 육군중장 출신인 과격한 미우라 고로(三浦誤樓)를

돌격대장으로 교체하게 합니다.

외상과 내상을 역임한  공사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본국으로 송환됩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전임공사 '이노우에'(당시 59세)의 고향 선후배 관계인 '미우라' 공사

(당시 48세)는 부임하자 마자 공관에 무쳐 거사를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한 달 만에 왕비 제거라는 일명 ‘여우사냥’이라는 특급비밀작전을 실행에 옮기게 됩지다.

 

1895년. 일본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는 '스키무라 후카시'(杉村濬) , '오카모노 류노스케'(岡本柳之助)등과 함께 명성황후 제거작전을 모의하면서 명성황후와 정치적 앙숙관계이던 대원군을 끌어들이려 합니다. 섭정자리에서 물러난 대원군은 고종을 폐위하고 장손자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발각되어 장손 이준용이 역적으로 몰려 목숨만은 부지한 체 강화도 교동에 위폐된 이래 불만을 품고 공덕동 별장에 칩거하며 두문불출하던 차, 일본 측의 명성황후 살생의 거사계획에 대해 협조하는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노 류노스케'(岡本柳之助)가 운현궁의 대원군을  찾아와 집요한 회유와 설득을 합니다. 그해 8.16.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 사랑채에서  '오카모노 류노스케'는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4개항의 각서를 대원군에게 제시하고 대원군의 자필서명을 받아 냅니다.

 

 각서 내용은 「거사 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기고 일체 간섭하지않는다.」는 것이 주요내용으로 일본을 멀리하는 황후를 제거하려는 일본의 야욕과  정적 관계였던 며느리 명성황후를 끌어 내리려는 시아버지와의 갈등과 맞물리면서 황후 제거작전은 짜여가지만, 일본은 거사후 대원군의 정치 참여를 막아놓는 배수진을 칩니다.

 

                                                       명성황후 극중에서

 

서울에 주둔 중 이던 일본군 경성수비대 장교(후비대 소속)의 지휘 아래

행동대장으로는  한성신보사(일본외무성 첩보기관 역할)의 일본인(고문, 사장 아타치,기자,

영사관 직원 및 순사, 일본인 낭인들)을 비롯한  50여명의  거류낭인들이 선봉에 서게 됩니다.

 

 

85. 10. 8.  새벽 5시 가 넘어 .

오카모토(岡本柳之助), 아타치(安達謙藏) 등이 인솔하는 50여명의 狂盜(광도)들은 연금상태의

대원군을 떠메고 궐내로 진입, 궁왕 편전인 건천궁(乾淸宮)을 짖밞으며 왕비의 침전인

곤녕전(坤寧殿) 玉壺樓(옥호루)를 유린합니다.

고요하던 궁궐은 순식간에 비명과 괴성 속에 피와 살점이 튀는 아수라장이 되며 정(正)의 역사

흐름을 되돌려 놓습니다.

 

 왕비 시해에 앞서 직접하수인 오카모토(岡本柳止助)는 공덕리 대원군 별장을 어렵사리 방문

합니다. 그리고 일본인 한성신보사(漢成新報社)에 머물고 있는 수 십명의 日本인 낭인(浪人)을

포섭하고자 사장 아타치(安達謙藏)에게 왕비 시해에 앞장 설 것을 약속 받습니다.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은 물론 친일 조선인들과,당시 해산설이 나돌던 조선훈련간부인 제1대대장 우범선(禹範善), 제2대대장 이두황(李斗璜), 제3대대장 이진호(李珍鎬)와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등 을 포섭합니다.

 

시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우범선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 포섭되어 병력을 동원하여 명성황후 시신 처리를 도맡아 처리하는데, 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지고 타고남은 시신 잔해는 궁궐 내 우물 속에 버려지며 유해 일부는 휘하의 윤석우(尹錫禹)로 하여금 땅에 묻게해 증거를 인멸 합니다..

 

그 사건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여인'사카이 나카'와 결혼하고 우장춘을 슬하에 남기고 건너간 자객  고영근( 高永根)에 의해 1903. 11. 구레시(吳市)에서 참살됩니다.

 

 

                                                                            옥호루

 

우장춘(禹長春)박사는 세계적인 육종(育種)학자로서  6.25  사변 와중에 귀국하여 일생을 조국의 농업발전위해 헌신하였는데  아마 그길이 부친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속죄하는 길이라 생각하였겠지요.

 

 

역사의 판단은  흐르는 시간 속에  무쳐가고 있습니다.  미우라 고로(三浦誤樓)일본공사는 10. 8 새벽. 거사를실행키로 하고 3시경  대원군 별장인 아소정(我笑亭)을 비밀리에 방문하고 서대문을 경유, 그곳에서 한 무리와 합쳐 경복궁으로 향하게 합니다.

 

 

 

* 극비문서 - 국왕 무사, 왕비 살해 1895.10.8 을미사변 당일 사건발생 4시간후 오전 9시 경 주한 일본공사 수비대 소속 '니이로'해군 소좌가 일본 육군참모부에 보고.         

 

 

 

 

 

서울 외곽 효창원

 

(현 효창공원부근)에 주둔한 오시마(大島) 혼합 여단 8,000여명의 병력은 

야밤에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정예 1개대대가 경복궁에 투입됩니다.

조선 왕궁의 정문. 광화문에서 궁궐 수비대와 교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숨차게 달려온 궁전 수비대장 홍계훈(洪啓薰)은 군부대신 안경수(安경壽)

 

등과 함께 400여명의 궁전 경비대 병력을 이끌고 제지하나, 잠복한 일본 저격수에 홍계훈은 전사하고 안경수는 패주합니다.

 

뚝  터진 물 처럼, 고삐 풀린 야수 처럼..

폭도들은 국왕 편전인 건청궁(乾淸宮)에 들이 닥치며

왕의 침전인 장안당(長安堂)과 왕비의 침전인 곤녕전(坤寧殿)과 옥호루(玉壺樓)를 유린하며

왕의 의복을 허트리고  세자 목 뒷 부분을 칼집으로 내려치며 위해(危害)를 가하며 광란의 질주를 하는 가운데 팔 저의며 광도들을 저지하던 궁내부대신(왕실사무를 보는 곳으로 의정부 수장인 총리대신 다음 서열)  이경직(李耕稙)은 그 자리에서 일본인 사관의 총을 맞고 칼로 베어져 살해됩니다.

 

 

광기의 폭도들은 

궁궐 밀실을 샅샅이 뒤지고 나인을 추궁하여,

건청궁(乾淸宮) 내 궁녀들과 함께 피신한 왕비에 접근하여  왕비를 보호코자

양필을 내저으며 몸으로 가로막는 궁인과 궁녀들을  흉도의 칼날은 사정없이 

도륙하며 살해하고 ...

 

고종의 침실인 장안당(長安堂)을 향해 뛰쳐나는

왕비를 쫒아가 등 뒤에서  허공을 그리는 예리한 칼로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의 왕비이며

삼천리 조선 만 백성의 국모(國母)인

왕비의 허리를 가름니다.

 

 

순간 왕비는 하늘을 보며 세자(순종)를 애타게 찾으며 쓸어져 가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흉노들은 왕비의 시신을 확인하고  왕비의 침실 곤녕전(坤寧殿)곁

옥호루(玉壺樓)에 시신을 잠시 안치한 다음에  궁궐 담장 넘어 후원 숲속 녹산(鹿山) 에서 

기름을 들이 부어  왕비 시신(屍身)을 불 태워 버립니다.

 

 

아녀자이기에 앞서 한나라의 국모이기에 그랬나요..

 

하늘도 울고 이땅의 만백성은 울었으리요 !!

 

 

                                                               명성황후장례행열

 

이렇게 한나라의 

국모를 ..천하가 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폭도들은

어둠을 깨는 여명이 드리우는 광화문을 유유히 빠져 나가 사라집니다.

피절인 가슴으로. 밝아오는 태양을 가리면서...

 

역사의 순간은 1895. 10.8. (양력) 새벽 7시 30분을 지나가고 있었으며

왕비의 나이는  45세였습니다.

 

참변 직후 강녕전(康寧殿)에서  대원군은 장안당(長安堂)으로 들어가

고종과 대면하게 됩니다.

뒤이어 미우라 고오르(三浦誤樓)공사도 입궐하여 수습책을 제시하고

이어 즉석에서 정부가 개편되어 ,

 

훈련대로 하여금 경복궁을 포위하고 민비세력과 친러세력의 접촉을 차단하고 대원군을

주재(主宰)케하여 민비계 친러, 친미 세력이 완전히 배제된 가운데 친일 내각이 구성되어

제4차 김홍집내각이 출범하게 됩니다.

 

명성황후 암살이후 고종은 궁안에 포로가 됩니다. 경복궁은 일본군이 훈련시킨 훈련대가

호위하고 궁밖에는 1,000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됩니다.

 

명성황후기 시해된지 이틀만에 고종을 만나본   <뉴욕헤럴드 The New York Herald>지의 

특파원 코커릴(Colonel Cockerill)은 그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계단을 몇 발자국 올라가 낭하를 건너 작은 방으로 들어가 다시 왼편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여니 한식

으로  볼품없이 꾸며진 더 작은 방이  그 안에 있었다. 방안에는 안짱다리로 선  왕이 창백한 얼굴로 초라

하게 있었으며 그 옆에는 명색이 세자라는 그의 아들이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왕은 체구가 작고 야위었으며 혈색이 없어 보였다. 최근 며칠동안의 일련의 사건들이 그를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는지 , 신경쇠약이 된듯한 왕의 모습은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었다. 그는 통역을 맡고 있는 존스를 향해 우리와 악수를 해도 좋은지 물었다. 그는 매우 반갑게 우리와 악수를 한 다음 그의 옆에 서있는 여릿여린 듯한 그의 아들에게도 방문객과 악수를 하도록 했다. 

[주 : 고종의 2남인 순종(李拓)은 어려서 부터 병약한데다 일본인에게 매수된 내관 김홍륙(金鴻陸)이 왕세자가

        마시는 차에 독(다량의 아편)을 타 건강을 잃었다함.]

이 때 러시아 공사가 크고 두툼한 통을 왕에게 주면서 과일과 음식이 약간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매 때마다 독살의 공포 속에 살아온 왕은 그 통을 받았다. 열쇠도 전달되었다. 왕은 믿음직한 다이(William Dye)장군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해달라는 듯한 몸짓을 하면서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눈길로 웨베르공사를  바라 보았다. 그는 무도병(舞蹈病)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처럼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슬픈 눈길로 무엇인가를 애원하고 있었다.

 

왕을 보위하던 각료들은 미국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완용,이윤용,이하영,이채연,민상호,현흥택 등은 미국공사관으로  이범진,이학균, 등은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했다. 친한파 영국 기자인 맥킨지(Frederick Mckenzie)는 이를 가리켜 "모든 관리들과 군인들은 침몰하는 배의 쥐새끼 처럼 잽싸게 도망쳤으며, 자신이 궁궐안에 있었다는 모든 징표를 없엤다"고 표현 했다.

(자료: KEYWORDGUIDE)

 

                                                                      명성황후 시해

                                                             

                                              

그 당시 일본은 

광화문 바로 코앞에 경성수비대라는 병력을 배치하게 됩니다.  원래 그자리는 조선군대가  

왕궁을 지켰으나  나약한 조선의 국력은 강력해 질대  강력해진 일본국에 의해 자리를 넘겨

주게 됩니다. 허수아비가 된것이죠.                                                                           

 

일본은 일찌기 개화의 눈을 뜨고 새로운 서양의 신문화를 받아들여 일깨여져가며                                         

국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집중된 힘을 중심으로 앞서 나가게 됩니다.     

 

우직하게 수레로 끌고 가는데 자동차로 앞서 나가는데 ..

그 차이는 아마도 아시리라 봅니다.

현시대에도 그렇지만 누가 먼저 앞서가느냐 문명을..

그에 따르는 이기(利器)는 앞서가는 자만이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에서 삐거덕 거릴 때

그네들은 앞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도이기에 열강의 지정학적 이해의 각축장이 된것은 역사의 순리이겠지만..

그것을 이용치 못하고 강대국의 희생이 된것이 그 당시 어쩔 수없는 실정이였겠지요...

 

힘센 대륙의 강국 청국과 서양의 신 문물을 일찌기 받아들여 깨인 일본의 야망 속에

그 사이에 끼인 조선은 강자들의 힘의 각축장으로 변질되어 간것은 아마도 시대의

흐름이였는지도  모릅니다.

 

 

                                                                             쿠시다 신사

 

1880년 후반

조선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을 밀어내기 위해 일본은 청국과의 결전을 준비하며 군력을 강화

합니다. 1885년에는 텐진조약을 통해 조선에 무슨일이 일면 청국과 동시 출병한다는 조약을

체결하면서....남에 나라를 그네들 마음대로 처리 합니다.

 

힘 없는 자, 힘 없는 국가가 받는 현실 입니다.  그래도 안에서는 밥그ㅡ릇 싸움입니다..

  

1894. 동학농민이 봉기합니다.

민씨 정권은 외척을 중심으로 매관 매직을 일 삼고

관직을 돈으로 산 군수나 현감 등 지방관들은 본전을 뽑기위해

온 갖 수탈을 자행해 민생을 더욱 피폐하게 합니다. 

곪아 터지게 된것이죠.

 

 

최신병기로 정예화된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구식무기와  의기로 충만한 농민군을 사정없이 제압하게됩니다. 보국안민(輔國安民),위정척사(爲政斥邪)등을 외치며 동학교도와 농민을 무장화해 탐관 오리응징과 일본침략행위에 맞서 봉기했던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全捧準:1855~1895)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대패한 후 동학군을 해산하고  순창에 은거하며 재기하던 중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그리고 얼마 후 참수됩니다. 그때 나이 40세.

 

 

                    체포되어 일본영사관에서 법무아문으로 이송되기 직전 일본 사진작가

                    '무라카미 텐스이'가  일본영사관의 허가로 촬영 함.

 

 

 

 

청군은 농민군을 

진압한다고 군대를 출병시키고..

이에 질쎄라 일본도 군대를 조선 국내에 파병 합니다..

 

일본은 잽싸게 그네들이 목적하는 바를 실행합니다.

동학혁명의 진압보다도 바로 경복궁 앞에있는 통신시설인  전신시설국을 접수하게 됩니다.

이제나 저제나 정보가 승리의 관건이니까요.

전신(정보 전달)과 철도(물류수송)은 근대 전쟁의 주요한 인프라  였기에.

그 덕분인지 7 개월 만에 청 일전쟁에서 일본은 대승를 거머집니다.

 

청일전쟁 후 달콤한 승리감에서 깨이기도 전에 삼국간섭(러.독,프)이라는 열강의 힘에 직면

하게 되자 일본은 요동반도를 다시 청국에 조건을 걸어 반납하게 되는데.

섬 국가인 그네들로서 꼭 거쳐야만하는 조선의 지배권은 놓치기 싫었으리라 봅니다.

 

신흥으로 부상하는 인접국 러시아를  인식하면서 한반도의 기득권을 내놓를 수 없는 그네들

이기에..삼국간섭이 점점 조여오메..

조선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갖는 것이 그네들의 뜻 이였겠지요.

 

.

왕비 시해 후 들끓는 민심은 의병활동으로 촉발되고(을미의병),

일본에 의해 경복궁에 연금되었던 고종은 1896.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됩니다(아관파천). 내나라 군주가 내 땅에서 남의 나라 집에 피신하는

 

서글픈 일이 1년간 지속되다가 1897. 경운궁(덕수궁)에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 시해된 왕비도 명성황후(1851-1895)로

추책(追冊)됩니다.

 

 

                                               쿠시다신사 보관 {토오가츠아키(藤勝顯) 증}

 

 

 

왕비 시해사건 

(을미사변)을 '훈련대'라는 일본 사관이 훈련한 조선군을 이용하여 대원군을 옹립하고 대원군과  왕비세력과의 알력으로 일어난 사태로 몰고 가려던 일본은 당시 현장에서 생생한 피의 광란을 목격한 주한 외국인(외교관,저널리스트,기술자,민간인 등)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어찌할 수 없어..

 

사태를 수습한다고 시해에 가담한 폭도들을 본국으로 압송하여 히로시마(廣島)감옥에 수감하나 얼마지나지 않아 그들을 증거 불충분으로 방면하고 그들은 대우를 받았다하니 조금이라도 일말의 양식있는 그네들 이라면  준엄한 역사의 흐름 앞에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그들의 처사를...

외면하였겠지요..

 

을미사변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미,러,영,독,프 등의 구미 외교관들은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해본측에 전적인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대원군과 명성황후와의 알력으로 인한 불화를 알고 있었던지라 이사태에 대원군이 어떻해서든지 관여 했다고 생각합니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협조를 얼마라도 협조했다는 것인대..

 

일본의 강요인지, 자발적인지, 직접적인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심증은 가고 확고한 물증이 없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일본은  거사 당일인 그날 대원군을 야밤에 반강제로 끌어내고, 을미사변 이후 대원군과 고종황제는  반 유폐 상태인 점을 비추어 볼때 일본 측에 명분 쌓기에 이용되었다고 여겨지는 것 만이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환수위( 혜문스님)

 

 

2005. 시해 주범 

후손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洪陵)-고종과 명성황후

합장묘를 뒤늦게 나마 방문하고 사죄의 절을 올립니다.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한 ‘쿠시다’ 신사(神社)에는 한 자루의 칼이 보관되어 있는데       

나무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일본인 자객‘토오가쯔아키’(藤勝顯)는 명성황후 시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 사람

중에 한사람 이라고 합니다.(日 문필가 쯔노다 후사꼬 기록:명성황후-최후의 새벽)

일본 육군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와 토오가쯔아끼는

왕비의 거소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왕비를

절명시켰던 가장 유력한 사람이라고 밝히는데,

 

 

뒷날 토오가쯔아끼는 그 날의 범행을 한탄하며

승려가 되어 세속을 등집니다.

시해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伊藤搏文)는 1909. 하할빈역에서

대한제국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쓸어집니다.

 

                                                                            

                                     

 

비명에 간 왕비는 

육신은 난자당해 비참했지만..

왕비를 그리는 많은 백성의 사랑과 함께..

 

공작이 되어 날아 갔으리...

 

 

 

자료 :daum.naver.지식.이미지,뮤직.명성황후site  .                                                                                                                             Music : 명성황후 OST(나 가거든 /조수미)--You 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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